새로운 제국의 시작
이런 가운데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당시의 복잡한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돕는 안내판 역할을 해줄 새로운 제국이 등장하는데, 바로 바빌로니아다. 이 제국과 관련해서 그 누구보다 널리 알려진 또 다른 이름이 하나 있다. '법전'으로 유명한 바빌로니아 제국의 왕, 함무라비가 그 주인공이다. 함무라비가 만든 법전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복수법의 원칙'을 표명하는 가장 오래된 법전이다. 그러나 만일 법전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함무라비는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인물이다. 그는 최초로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통일한 통치자이기도 했다. 바빌로니아 제국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제국의 수도였던 바빌론은 함무라비 시대부터 메소포타미아 남부지역에서 셈족의 상징적인 중심지가 되었다. 우르가 멸망한 뒤 혼란스러워진 시기에 한 아모리 부족이 경쟁자들을 모두 무너뜨리면서 바빌로니아 제국이 시작되었다. 함무라비는 기원전 1792년에 왕이 되었다. 그의 후계자들은 약 200년간 제국을 유지했지만, 곧 히타이트가 쳐들어와 멸망하고 말았다. 그 뒤 메소포타미아는 또다시 곳곳에서 밀려온 민족들에 의해 분할되는 운명을 맞았다. 바빌로니아 제국은 한때 수메르 땅과 페르시아 만 외에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인 아시리아까지 뻗어 있었다. 함무라비는 티그리스 강의 니네베와 님루드, 유프라테스 강의 마리 같은 도시를 다스렸고, 오늘날의 시리아 지역인 알레프 근거 티그리스 강 유역까지 관리다. 길이 1,200kn에 폭이 160km 달하는 이 제국은 당시 그 지역에 등장한 국가 가운데 가장 거대한 국가였다. 우르는 이미 사라졌고, 그곳은 바빌로니아 제국에 공물을 바지는 지역이 되어 있었다.
함무라비 법전
바빌로니아 제국에는 정교한 행정 제도가 갖춰져 있었다. 함무라비 법전도 그중 하나였다. 그 전의 법률 혹은 법전도 그랬을 테지만, 함무라비 법전은 대중들이 언제라도 볼 수 있도록 돌에 새겨 신전의 안뜰에 세워 두었다. 함무라비 법전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세계적인 명성을 누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함무라비 법전은 그 전의 법전보다 훨씬 더 길고, 알기 쉽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약 282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임금, 이혼, 의료비 같은 다양한 문제를 폭넓게 다루고 있었다. 하지만 이 법은 새롭게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존의 법 내지 규범을 공식적으로 선포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새로 만든 제정법을 의미하는 '법전'이라는 용어는 사실 적합하지 않다. 함무라비는 이미 습관이나 관행으로 굳어져 있던 것들을 한데 모아 법으로 정리한 것이다. 그는 법을 새롭게 강조한 것이 아니었다. 이 관습법 세계는 메소포타미아 역사에 일관성을 심어 준 중요한 토대였다. 함무라비 법전은 가족, 땅, 거래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이는 당시 사회가 이미 지역공동체나 혈족 중심으로 움직이는 단계를 훌쩍 뛰어넘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함무라비 시대에 이르면, 재판 절차는 신전 밖에서 이루어졌고 국가가 세운 법정이 재판을 주관했다. 법정에는 각 지역의 고위 인사들이 앉아있었고 사람들은 여기서 바빌론이나 왕에게 탄원을 했다. 함무라비 법전이 새겨져 있는 비문을 보면 법을 만든 목적이 정의를 확립하려는 것 임을 알 수 있다. 불행히도 이전의 수메르 관습에 비하면 형벌은 무척 가혹했다. 그러나 여성에게 관대했다는 점 등에서 수메르의 전통은 여전히 바빌론에 살아남아 있었다.
바빌로니아 제국의 노예제와 사치
재산에 관한 함무라비 법전의 규정을 보면 노예제에 관한 것이 있다. 다른 모든 고대 문명과 현대의 많은 문명이 그랬던 것처럼, 바빌론도 노예제에 의존하고 있었다. 노예제는 정복 전쟁에서 비롯되었다. 초기 역사시대에 전쟁에서 패한 자는 어쩔 수 없이 노예의 운명을 감수해야 했다. 여자와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빌로니아 제국 시대에는 이미 정기적인 노예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노예 가격이 일정했다는 것은 꽤 정기적으로 거래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뜻한다. 어떤 지역의 노예들은 말 잘 듣고 일 잘한다는 믿음을 얻어 시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노예는 사실상 주인의 소유물과 다름없었지만, 일부 바빌로니아인 노예는 상당한 자유를 누렸다. 그들은 사업에 참여하고 심지어 자신의 노예를 따로 소유하기도 했다. 부분적이지만 법적 권리까지 주어졌다. 노예제도는 분명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고대 세계에서 노예제가 실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지를 상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노예들이 여러 가지 일을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대부분의 노예가 힘든 삶을 살았겠지만, 자유로운 사람들 역시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노예로 잡혀 가는 포로들의 삶을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동정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기원전 2500년 무렵 우르의 '금으로 된 기념물에서부터 1500년 뒤 아시리아의 정복을 묘사한 돌로 만든 조각상까지 수십 점의 기념물들이 정복 국가의 왕 앞으로 끌려가는 포로들의 비참한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고대 세계의 문명은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방식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잔인한 말일지 모르지만, 그들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바빌로니아 문명은 이후 찬란한 전설이 된다. 바빌론'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야기 등 때문에 쾌락과 사치가 넘치는 부도덕한 도시로 흔히 알려져 있다. 이런 바빌론의 이미지는 대부분 후대에 만들어졌지만, 바빌로니아 문명의 규모와 풍요를 짐작하게 한다. 실제로 바빌론의 이러한 이미지를 확인할 수 있는 유적도 있다. 유프라테스 강 근처 마리의 거대한 왕궁이 그 좋은 예다. 왕궁은 안뜰이 12m 두께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300개 남짓한 방이 있었다. 9m 깊이의 바닥에는 안쪽 면에 원유를 가공해 만든 역청을 칠한 배수관이 갖춰져 있었다. 왕궁이 차지하는 면적은 약 2만 5,000m²에 달했다. 마리의 왕궁은 당시 군주가 누렸던 권위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또 수많은 진흙판이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당시 국가가 관여한 사업과 그 구체적 내용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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