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론의 문화와 과학
최초의 바빌로니아 제국은 많은 진흙판을 남겼다. 그 전의 모든 문명과 그 후 곧이어 나타나는 몇몇 문명권보다도 많았으며, 여기에 새겨진 글이나 그림은 바빌로니아 제국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그 덕분에 우리는 1,000년 전 유럽의 몇몇 국가보다 그 이전의 바빌로니아에 대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바빌론에서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관해서도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길가메시 서사시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으로 자리를 잡은 것도 이때였다. 바빌로니아인들은 음절에 기초해 설형문자를 기록했다. 이로써 설형문자는 훨씬 더 다양하고 풍부한 표현이 가능해졌다. 별자리 등을 통해 미래를 점치는 점성술이 발달하면서 그들은 자연을 깊이 있게 관찰하기 시작했으며, 놀라운 과학성을 갖춘 칼데아인의 점성술 신화를 낳았다. 여기서 칼데아인은 바빌로니아인과 같은 말이다. 바빌로니아인들은 별자리를 통해 자신의 운명을 알고 싶어 했다. 이는 천문학의 확립과 발전에 밑바탕이 되었는데, 바빌로니아인들의 천문학적 관찰은 그들이 남긴 위대한 유산 중 하나였다. 우르에서 시작된 천문학적 지식이 틀을 잡아나가는 데에는 수세기가 걸렸지만, 기원전 1000년경에는 월식의 예측이 가능하게 되었다. 또 그로부터 200~300년 후에는 태양과 몇몇 행성의 궤도를 상당히 정확하게 표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과학적 전통은 수학에도 반영되었다. 수메르의 60진법은 바빌로니아의 수학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원의 내각을 360도로 한다든가, 1시간이 60분으로 나뉘는 것은 수메르의 60진법에서 유래되었다. 바빌로니아인들은 또한 일상생활에서 편리하게 쓸 수 있는 수표와 대수 기하학도 만들어 냈다.

바빌로니아의 종교
천문학은 사실 신전에서 시작되었다. 천체의 움직임을 보고 사람들에게 풍요를 기원하는 축제나 밭에 씨앗 뿌리는 일을 언제 해야 할지 알려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바빌로니아의 종교는 수메르의 전통을 충실하게 유지했다. 바빌론에도 여느 고대 도시와 마찬가지로 고유한 신이 있었다. 그 신의 이름은 마르두크였다. 마르두크는 점차 메소포 타미 통치한 이슈 툴 아의 다른 신들을 제치고 바빌론을 대표하는 신이 되어 갔다. 물론 그 과정에는 오랜 기간 필요했다. 함무라비는 수메르의 신인 아누와 엔릴이 메소포타미아 최고 신의 자리를 마르두크에게 넘겨주었으며, 그에게 모든 사람을 다스리도록 지시했다고 말했다. 그 뒤 혼란스러운 세월이 이어지면서 마르두크의 위상은 잠시 흔들렸다. 때로는 침략자들이 마르두크의 조각상을 약탈해가기도 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마르두크의 권위는 기원전 20세기 이후 크게 의심받은 적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바빌로니아의 종교에는 수메르의 전통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종교의식은 모두 수메르어로 진행되었으며, 그들이 섬긴 다양한 신들과 그들의 역할도 수메르의 그것과 비슷했다. 바빌로니아의 우주론 역시 수메르와 마찬가지로 탁한 물에서 천지가 창조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바빌로니아인들에게 인간은 신의 노예로 창조되었다. 신이 진흙으로 만든 거푸집에서 인간을 벽돌처럼 찍어 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 같은 우주론은 왕 중심의 절대군주 기원전 2100년 마리를 릴 룸의 모습이다. 근엄 제에 적합했다. 절대군주제 표정이 인상적이다. 에서 왕은 신처럼 노예에게 권력을 행사했다. 노예는 왕궁을 짓고, 하늘의 질서를 반영한 현실 사회를 떠받들었다.
바빌론의 몰락
함무라비의 위업은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메소포타미아 북부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함무라비가 제국을 건설하기 이전에 이미 새로운 세력이 등장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함무라비는 우르의 세력이 끝나 갈 때쯤 아시리아에 터를 잡고 있던 아모리족 왕국을 굴복시켰다. 그러나 아시리아는 거의 1,000년 동안 격변의 세월을 보내다가 마침내 문명의 뿌리가 같은 바빌로니아를 압도하게 되었다. 이제 메소포타미아 역사의 무게중심은 옛 수메르 지역에서 북쪽으로 완전히 옮겨 갔다. 기원전 2000년이 가까워질 무렵, 아나톨리아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히타이트 인은 그 뒤 몇 세기 동안 천천히 세력을 키워갔다. 당시 히타이트 인들은 설형문자를 들여와 자신들의 말을 문자로 표현할 수 있었다. 기원전 1700년경, 히타이트는 시리아와 흑해 사이의 땅을 장악했다. 그리고 더욱더 세력을 넓혀 바빌로니아를 압박했다. 바빌로니아는 이미 상당히 약해져서 예전 아카드 때의 크기로 줄어들어 있었다. 히타이트의 왕은 마침내 최후의 진격에 나섰다. 결국 바빌론은 함락되었고, 함무라비 왕조와 그의 업적은 마침내 끝이 나고 말았다. 하지만 그 뒤 히타이트는 이 지역에서 물러갔고, 바빌로니아는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 후 400년 동안 다른 여러 민족이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하며 서로 싸움을 벌였는데, 이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다만 바빌로니아의 지배를 받던 아시리아가 떨어져 나가 독립된 제국을 세운 것만은 분명하다. 이 사건은 그 뒤 1,000년간 메소포타미아에서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기원전 1162년 바빌로니아는 또다시 엘람인 정복자의 침략을 받았다. 이때 바빌론에 있던 마르두크의 조각상도 약탈당했다. 그 무렵 매우 혼란스러운 시대가 시작되었고, 세계사의 초점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아직 아시리아 제국이 남아 있긴 했지만, 이는 곧 기원전 13세기와 12세기에 있었던 한 해상 민족의 거대한 이주 물결 속에 파묻혀 버리고 말았다. 이후 역사는 수메르 문명의 계승자들보다는 또 다른 문명들과 훨씬 더 깊은 관련이 있었다. 하지만 수메르의 계승자나 그곳을 정복한 자들, 다시 그들을 쫓아낸 자들 모두 수메르 시대에 확립된 정치적·문화적 토대 위에서 세력을 구축했다. 기원전 1000년에 이르면 서아시아는 세계 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물론 세계 정치라는 말이 당시에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 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상관없이 기술, 지식, 종교 등 거의 모든 측면에서 최초의 문명을 세운 지역이 서아시아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들의 유산은 이제 기묘하게 변형된 형태로 다른 이들에게 넘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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