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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수메르의 사회 과학적 역량에 대해서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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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과 기술

수메르인들은 대단한 기술적 독창성을 갖고 있었다. 다른 민족들은 수메르인들의 이러한 기술 수준에 큰 빚을 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숫자를 기호로 표시하고 또 숫자를 다양하게 배열하는 방법으로 수학의 기틀을 마련한 것도 수메르인이었다. 예컨대 우리는 소수점 위치에 따라 1을 1이나 10, 10분의 1, 혹은 다른 여러 값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원을 6등분 하는 방법까지 찾아냈다. 그들은 10진법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지만, 이를 실제로 활용하지는 않았다. 수메르의 역사가 끝나갈 무렵, 수메르인들은 여러 지역에서 따로따로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어떤 도시는 거주하는 남성만 3만 6,000명이었다고 한다. 그 인구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건축 기술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구라트 같은 거대한 기념비적 건축물은 실제로 그 이상의 건축기술이 필요했다. 돌이 부족했던 메소포타미아 남부지방에서는 처음에는 진흙으로 반죽한 갈대로 건물을 지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햇볕에 말린 진흙 벽돌을 사용했다. 벽돌을 이용한 그들의 건축 기술은 수메르 시대가 끝날 무렵에는 기둥과 계단식 단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건물을 만들 수 있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그중에서 가장 거대한 건축물인 우르 지역의 지구라트는 윗단까지의 높이가 30m가 넘었고, 밑면적은 약 2,700m에 달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물레도 우르에서 발견되었다. 도기를 만들 때 사용하는 도구인 물레는 회전운동을 이용한 최초의 도구로 이러한 물레 덕분에 도기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도기를 만드는 일은 이전과 달리 여자의 일이 아닌 남자의 일이 되었다. 곧이어 기원전 3000년경에 이르면, 수레바퀴를 운송 수단으로 사용하게 된다. 수메르인은 유리도 발명했다. 또 수메르의 전문 기술자들은 그 당시 청동기도 주조하고 있었다.

광범위한 교역망

그렇다면 수메르인들은 어디서 어떻게 원료를 구해 그러한 기술 발전을 이룰 수 있었을까?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는 금속을 구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전 신석기시대에도 수메르인들은 농기구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부싯돌과 흑요석을 다른 곳에서 구해 와야 했다. 아마도 수메르로부터 꽤 먼 곳까지 교역망이 뻗어 있었음에 틀림없다. 교역로는 레반트와 시리아, 그리고 이란과 바레인, 페르시아 만까지 이어져 있었을 것이다. 어떤 지역을 거쳐 왔을 수도 있지만, 메소포타미아는 기원전 2000년 이전에 이미 인도의 인더스 계곡으로부터 많은 물품을 들여오고 있었다. 이러한 기록들을 보면 그 무렵 이미 각 민족들은 국제적인 교역을 통해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2500년 무렵, 서아시아에서 주석의 공급이 끊기자 메소포타미아는 청동 대신 구리로 무기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농업 기술

태양 아래 보리가 자라고 있다.
보리

수메르의 경제는 농업에 의해 지탱되었다. 농업은 일찍부터 수메르인에게 풍요로운 결실을 가져다주었다. 보리, 밀, 수수, 참깨는 대량으로 재배되는 곡물이었다. 그중에서도 보리가 주요 작물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술과 관련된 유물이 많이 나오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된다. 강물이 자주 흘러넘쳐 생긴 침전물로 땅이 매우 기름지고 부드러운 곳에서 많은 수확을 올리는 데는 철제 농기구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들의 기술이 빛을 발한 분야는 밭에 물을대는 관개 방식과 토지 관리 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이 발전하기까지는 꽤 오랜 기간이 걸렸다. 수메르 문명에 대한 증거는 무려 150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