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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아시리아의 번성과 쇠퇴의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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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리아의 남기 기념물을 통해서 아시리아의 번성과 이후 쇠퇴의 과정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이 글을 통해서 아시리아의 마지막을 알아보실 수 있습니다.

아시리아 왕 아슈르바니팔이 사자 사냥에 나선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아시리아 아슈르바니팔왕

아시리아가 남긴 기념물

당시 아시리아인의 거대한 영향력은 인상적인 기념물들을 통해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기원전 721~705년, 사르곤 2세는 니네베 근처의 호르 사바드에 거대한 왕궁을 세웠다. 호르 사바드 왕궁은 그 넓이가 약 1.3km 고, 길이가 1.6km가 넘는 부조 작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정복 사업으로 얻은 이익은 궁정의 재정을 풍요롭고 화려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아시리아의 마지막 왕 아슈르바니팔(기원전 668~626) 역시 기념물을 남겨 놓았다. 그중에는 이집트의 테베에서 니네베로 가져온 오벨리스크도 있다. 아슈르바니팔은 학문과 고대 유물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남긴 가장 훌륭한 유물은 니네베의 도서관에 수집해 놓은 진흙판 들이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기록과 문학 작품을 모두 모아 놓았다. 메소포타미아 문학에 대한 사실들은 대부분 아슈르바니팔의 진흙판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그중에는 수메르어를 번역한 길가메시 서사시의 완본도 있었다. 아시리아 문명을 움직인 사상은 다른 자료뿐만 아니라 문학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시리아 왕은 종종 사냥꾼으로 등장한다. 이는 왕을 전사로 표현한 것이며, 또한 예전에 수메르 문명에서 그랬듯이 왕을 전설적인 자연의 정복자로 보는 것이기도 하다. 아시리아 왕의 업적을 기념하는 부조 작품들을 통해서도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다. 약탈, 노예화, 형벌, 고문, 집단 유배 같은 것이 그 예다. 아시리아 제국은 정복과 위협이라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지탱되었다. 이는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강력한 군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아시리아의 모든 성인 남자는 의무적으로 병사가 되어 철제 무기를 들고 전쟁에 나갔다. 그들은 성을 공격할 무기를 갖추고 있어서 철벽 같던 성벽도 무너뜨릴 수 있었다. 철로 무장한 기병대까지 있는 아시리아군은 모든 무기를 갖춘 군대였다. 어쩌면 여기에는 특별한 종교적 열정도 있었을 것이다. 아수르 신은 아시리아군이 전쟁터에 나갈 때마다 등장한다. 왕들도 아수르 신에게 가서 신앙심이 없는 자들로부터 얻은 승리를 알리곤 했다.

아시리아 제국의 멸망

아시리아는 큰 번영을 누렸지만, 곧 쇠퇴했다. 아마도 방대한 영토가 아시리아인에게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아슈르바니팔이 사망한 다음 해에 제국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 징조는 바빌론에서 일어난 반란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반란을 일으킨 무리들은 칼데아인뿐 아니라 메디아 왕국에서도 지원을 받고 있었다. 메디아는 아시리아 근처에 있던 이란계의 강력한 국가였다. 역사의 무대에서 메디아가 주요 국가로 등장한 사건은 중요한 변화였다. 메디아인은 오랫동안 북쪽에서 침입해 오는 야만족들을 막아 내느라 다른 데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북쪽의 야만족이란 스키타이인으로, 흑해 유역의 카프카스에서 이란으로 밀고 내려왔다. 동시에 흑해 연안을 통해 유럽 쪽으로도 나아갔다. 간단한 무기들로 무장한 스키타이의 기병들은 말을 탄 상태에서 적에게 활을 쏘곤 했다. 그들은 중앙아시아의 유목 민족으로 7세기에 흑해 지방에서 서아시아로 밀고 내려왔다. 이는 사실 서아시아에 새로운 중요 세력이 침입해 들어온 최초의 사례였다. 스키타이인은 서아시아로 내려오면서 다른 민족들을 차례차례 몰아냈다. 소아시아에서 번성했던 프리기아 왕국은 스키타이인에게 쫓겨난 키메르인에 의해 멸망했다. 그러는 동안 이전의 정치 구조는 스키타이인, 메디아인, 아시리아인에 의해 모두 무너졌다. 이 모든 일이 이뤄지는 데는 100년이 넘게 걸렸지만, 마침내 역사의 무대는 완전히 새로워졌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주변이 불안한 상태였던 덕분에 아시리아는 강력한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키타이인과 메디아인이 힘을 합쳤을 때는 상황이 전과 같지 않았다. 그리하여 아시리아는 한계에 다다랐고, 바빌로니아인은 독립을 되찾았다. 기원전 612년 메디아가 니네베를 함락하면서 아시리아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니네베의 약탈이 메소포타미아의 전통을 단절시키지는 못했다. 아시리아의 몰락으로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새로운 주인을 맞았다. 북쪽은 메디아인이 장악했는데, 그들은 지중해 동부의 아나톨리아로 밀고 들어가 리디아 왕국의 국경 지역까지 이르렀고, 한편으로 스키타이인을 러시아로 다시 쫓아내 버렸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남부와 레반트 지역을 손아귀에 넣었으나, 곧 바빌로니아의 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치하에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한여름 밤의 꿈같은 잠시 동안의 찬란한 영화를 맞았다. 메소포타미아가 가장 큰 번영을 누리며 우리의 상상력을 사로잡는 시대는 이 마지막 바빌로니아 제국, 즉 신 바빌로니아 제국시대다. 신 바빌로니아 제국은 수에즈에서부터 홍해, 시리아를 지나 메소포타미아와 예전 엘람 왕국의 국경까지 펼쳐져 있었다. 엘람 왕국은 당시에 아케메네스라는 이란계의 작은 왕조가 다스리고 있었다. 어쨌든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위대한 정복자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그는 유대인이 반란을 일으키자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을 파괴했고, 유다 왕국의 주민들을 포로로 삼았다. 그들을 바빌론의 건축물을 짓는 데 쓰기 위해서였다. 그의 '공중 정원'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는 당시 가장 위대한 왕이었으며 그 전에도 그를 능가하는 왕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