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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페니키아인에 대해서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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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니카아인과 그들의 근거지에 대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이 글을 모두 읽으면 페니카아인 및 해상 민족 페니키아인, 무역 기지를 알아두시는 데에 보탬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페니카아인과 그들의 근거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모두 읽어주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제 아래에서 알아봅시다.

페니키아 지역 관광지의 모습
페니키아

해상 민족페니카아인

페니키아인은 해상 민족이자 무역 민족으로길고 험난한 역사를 이어 왔다. 그러나 전설속에서는 실제 역사보다 훨씬 더 오래 이어온 것으로 전해진다. 페니키아인의 주장에따르면, 그들은 기원전 2700년경 지중해 동쪽 레바논 남부의 티레에 도착했다고 한다.이런 주장은 조금은 과장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페니키아인이 기원전 2000년대에 이미 오늘날의 레바논 해안에 정착한 것은 사실이다. 그 무렵 이집트인은 페니키아인으로부터 삼나무 목재를 수입하고 있었다. 페니키아인은 셈족이었고 홍해의 아랍인들처럼 선원이 되었다. 바다에 접한 지리적조건 덕분에 그들은 내륙보다 해상으로 눈을돌리게 되었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아시아와아프리카의 교통로가 되어 온 좁다란 해안지역에 살았다. 주변 지역의 땅은 농업을 하기에 좋지 않은 조건이었고, 해안 지역의 마을과 도시들은 언덕에 막혀 서로 교류하고연합하기가 어려웠다. 페니키아인도 후대의 그리스인처럼 바다.를 이용한 다양한 활동에 매력을 느꼈다. 그결과 그들은 무역뿐만 아니라 식민지를 만드는 사업에도 열정적으로 뛰어들었다. 사실 페니키아인은 본국에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래서 헤브라이인, 이집트인, 히타이트인에게 차례대로 지배당하기도했다. 이집트와 미케네, 히타이트 제국이 쇠퇴한 후 페니키아인이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들은 다른 나라가 쇠퇴하는 동안 세력을 확대해 갔다. 비블로스, 티레, 시돈등 페니키아의 도시가 짤막하나마 황금기를누린 것은 미노아의 무역이 활발하던 시대가훨씬 지난 기원전 1000년 이후의 일이었다. 당시 페니키아의 중요성은 성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솔로몬의 신전을 건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솔로몬은 “우리쪽에는 시돈 사람처럼 벌목에 능숙한 사람이없습니다.” 라고 말하며 그들에게 값을 제대로치러 주었다고 한다. 솔로몬의 신전 건립은고대에 유례가 없는 거대한 공공사업이었다. 페니키아인이 계속해서 중요한 활약을 했다는 증거는 그 뒤에도 많이 나타난다. 고대의 저술가들은 페니키아인을 상인이자 식민지 개척자로서 자주 강조했다. 그들은 심지어 잉글랜드 남서부의 콘월 지역 사람들과도목재를 거래했다. 그 정도로 먼 지역까지 나아갔다면, 그들은 상당한 항해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페니키아의 염료는 오랫동안 세계적으로유명했으며, 고전시대까지 사람들이 많이찾는 품목이었다. 그들은 분명 상업적인 필요성 때문에 새로운 것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알파벳이다. 그리스인들이 도입한 알파벳은 비블로스라는 도시에서 발명되었는데, 이 비블로스Byblos라는도시 이름은 책Book이라는 단어의 어원이기도 했다. 페니키아의 알파벳은 실로 엄청난 발전이었고, 이 덕분에 문자가 아주 많은 곳으로 보급될 수 있었다. 하지만 페니키아인이 남긴기록은 대단한 게 없었다. 반면 예술은 무역의 중개인이었던 그들의 역할을 비교적 잘나타낸다. 그들은 아시아와 이집트의 예술을 빌려 오거나 그대로 베꼈다. 아마도 예술 작품을 사는 사람들이 그런 것을 좋아했기 때문일 것이다.

해상 민족 페니키아인, 무역 기지

무역은 페니키아인의 직업이었고, 처음에는 이 때문에 해외에 정착지가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점차 식민지나 무역 기지가 필요해졌다. 어떤 때는 미케네인이 앞서 무역을 했던 곳에 무역 기지를 건설하기도 했다. 페니키아인은 지중해에 모두 25곳의 무역기지를 세웠다. 처음 세워진 곳은 지중해 동부 키프로스의 키티온으로 기원전 9세기 말에 세워졌다. 그 이후 초기 페니키아인들이 상업 활동을 벌이던 지역에 몇몇 식민지들이 건설되었다. 이들 식민지는 기원전 1000년대 초에 독립했던 시기가 잠깐 있었다. 하지만 그 후 페니키아의 도시들에는 곧 고난의 세월이 찾아왔다. 기원전 7세기 시돈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티레 왕의 딸들은 아시리아의 왕인 아슈르바니팔의 후궁으로 끌려갔다. 페니키아는 이처럼 점차 쇠퇴해 갔다. 페니키아가 지중해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한 것은 어쩌면 서쪽에서 밀려오는 그리스 식민지에 대한 불안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스의 식민지 건설은 금속을 얻는 데 방해가 되었다. 특히 영국의 주석과 스페인의 은을 얻기 어려웠다. 100여 년 전 페니키아가 아프리카 북부 카르타고에 식민지를 건설한 것도 금속을 원활하게 얻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카르타고는 나중에 티레나 시돈보다 훨씬 막강한 권력의 자리에 오르게 되고, 독자적인 식민지를 만들어 나가게 된다. 페니키아인은 서쪽으로 더 나아가 지중해와 대서양을 연결하는 지브롤터 해협 너머의 카디스까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곳을 대서양 무역을 북쪽으로 확대시키기 위한 전초 기지로 생각했다. 페니키아인은 여러 지역에 문명을 전해 준 가장 중요한 민족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페니키아인 말고 다른 민족들도 있었다. 예컨대 미케네인과 헬레네스는 그들의 문화를 확산시키고 문명의 중개자가 되었다. 크레타인은 그 이상이었다. 그들은 문명의 진정한 창조자였다. 그들은 위대한 문화의 중심지에서 문명의 씨앗을 받아들이고 문명을 꽃피운 뒤 그것을 다시 세계에 전해 주었다. 이들은 모두 보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를 창조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문명을 여러 지역에 전달해 준 이러한 민족들을 통해 유럽 대륙은 많은 자극을 받았다. 탐험가들은 광물을 찾기 위해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땅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갔다. 기원전 2000년대에 이미 복잡화된 미래를 예시하는 가장 오래된 증거가 있었다. 미케네에서 발견된 어떤 구슬은 발트해 연안의 호박이라는 광물을 재료로 오늘날의 영국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무역을 통해 점차 지역 간의 고립이 무너지고 사람들 간의 관계가 변화해 갔다. 또한 새로운 사상이 생겨나기도 했다. 하지만 민족주의가 한창인 에게 해 지역에서 무역을 통한 새로운 사상이 제대로 뿌리를 내리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기원전 2000년대부터 시작된 아시아의 혼란스러운 역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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