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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이집트의 쇠퇴와 남겨진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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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쇠퇴

신왕국은 투탕카멘이 죽고 나서도 200년간 지속되었지만 점차 빠른 속도로 쇠퇴해 갔다. 신왕국의 쇠퇴는 투탕카멘이 죽은 후 그의 부인이 히타이트 왕자와 결혼하려고 한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결혼식이 있기 전 왕자가 살해당하면서 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후대의 왕들은 쇠퇴한 나라를 되살리려고 애썼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럴 때면 이집트군은 팔레스타인 위쪽까지 세력을 넓히기도 했다. 어떤 파라오는 이전의 파라오들이 다른 민족의 공주와 결혼했던 것처럼 히타이트의 공주를 신부로 삼기도 했다. 하지만 곧 새로운 적들이 나타났다. 히타이트와의 동맹조차 더 이상 보호막이 될 수 없었다. 에게 해는 곧 혼란에 휩싸였다. '섬들이 사람들을 토해냈다', '그들 앞에서는 어떤 나라도 견디지 못했다. 이집트의 한 기록은 당시의 혼란을 이렇게 적고 있었다. 이 해상 민족은 마침내 격퇴되었지만, 그들과의 싸움은 힘겨운 것이었다. 이처럼 이집트가 극심한 변화를 겪고 있을 때, 이집트인들이 헤브라이인이라고 부르는 작은 셈족 집단이 나일 강 삼각주 지대를 떠났다. 전설에 따르면 그들은 모세라는 지도자를 따라 이집트를 벗어나 시나이 사막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기원전 1150년부터 이집트 안의 혼란을 드러내는 현상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람세스 3세는 궁중의 음모로 암살당했다. 그는 번영을 이룬 이집트의 마지막 왕이었다. 람세스 3세 이후에는 심지어 파업이 벌어지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생기기도 했다. 테베에 있는 왕들의 무덤을 몰래 파헤치는 일까지 벌어졌다. 파라오는 성직자와 관리들에게 권력을 빼앗겼다. 마지막 왕 람세스 11세는 자신이 사는 궁에 거의 갇혀 있었다. 이집트 제국의 시대는 결국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리고 기원전 2000년대 말에 이르면 히타이트나 다른 제국도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이집트 세력뿐만 아니라 이집트를 돋보이게 했던 주위의 세력들 역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이집트 사원의 조각된 사람의 모습
이집트유산

이집트 유산

이집트는 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을까? 아마도 고대 세계 전체에 영향을 미친 전쟁과 같은 극심한 혼란과 변화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신왕국시대 말기에 드러난 여러 문제점은 사실 이집트 문명이 시작될 때부터 있어왔던 것들이다. 하지만 이집트의 거대한 건축물과 수천 년간 이어온 그들의 역사를 보면, 이집트 문명이 초기 단계에서부터 문제점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란 쉽지 않다. 창조적인 면에서 보면, 이집트 문명은 사실 별다르게 이룩해 낸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엄청난 노동력을 한 곳에 모을 수는 있었지만, 그들이 만든 것은 거대한 묘지일 뿐이었다. 또한 뛰어난 솜씨를 지닌 이집트 기술자들이 만든 것은 고작 묘지의 부장품들이었다. 이집트에는 복잡하고 세련된 언어를 쓸 줄 아는 명석한 지식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더없이 편리한 도구로 글을 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집트인들은 그리스인이나 유대인에 비할 만한 철학적이거나 종교적인 사상을 후대에 남겨 주지는 못했다. 그토록 화려했던 문명의 중심에 기본이 될 정신적 바탕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집트는 매우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되었다. 그것은 대단한 일이다. 이집트는 적어도 두 번 이상 상당히 쇠퇴했던 시기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모습으로 다시 일어섰다. 그렇게 큰 규모의 국가를 다시 회복시킨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위대한 성공이다. 하지만 이집트가 더 발전하지 못한 채 그 수준에서 멈춰 버린 이유는 아직도 여전히 알 수 없다. 이집트의 군사적·경제적 힘은 결국 세계에 거의 아무런 변화도 낳지 못했다. 사실 이집트 문명은 다른 지역에 제대로 전파된 적이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고립된 주변 환경 때문일 것이다. 만약 이집트처럼 외부의 침략을 거의 받지 않았다면, 다른 고대 문명도 무척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을 것이다. 중국이 놀랄 만큼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것도 사실 그와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대에는 모든 사회적·문화적 변화가 대단히 느리고 미세하게 일어났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할 필요가 있다. 급격하게 변하는 현대사회 속에서 사는 우리는 변화에 익숙하기 때문에 과거에 번영을 누렸던 사회체제가 얼마나 오랫동안 변하지 않고 옛것을 지키려 했는지 깨닫기가 어렵다. 고대 세계에서는 급격한 변화와 발전이 지금보다 훨씬 더 적게 일어났다. 선사시대와 비교해 보면, 고대 이집트의 역사는 확실히 빠르게 전개되었다. 하지만 기원전 3000경 메네스 시대로부터 기원전 1450년경 투트모세 3세 시대에 이를 때까지 이집트인들의 일상생활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이는 무려 1,500년에 이르는 긴 세월이었다. 그들의 두드러진 변화는 갑작스럽게 대규모의 자연재해가 일어났을 때나 침략이나 정복이 일어났을 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일 강은 항상 자연재해에 어느 정도 안전장치가 되어 주었다. 또 이집트는 오랫동안 서아시아의 전쟁이 일어나던 곳 주변에 머물러 있었다. 이따금 출몰 후 사라져 간 이민족들에게나 영향을 받았을 뿐이다. 기술이나 경제적인 힘이 이집트인의 변화에 영향을 끼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학문 같은 지적 분야에서도 원래 알고 있던 것들을 그대로 유지하려고만 했기 때문에 큰 변화를 일으키기가 어려웠다. 이집트의 역사라고 하면, 늘 나일 강이라는 거대한 자연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나일 강은 언제나 이집트인들의 눈앞에 있었다. 그 존재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이집트인들은 그 유역을 벗어난 더 큰 세상을 바라볼 수 없었을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우리가 다 알지도 못하는 수많은 전쟁이 일어났지만, 고대 이집트는 같은 시대를 지나오면서도 여기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고 수천 년간 유유히 이어져 왔다. 이는 나일 강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나일강기슭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강이 선사하는 풍요로움을 누렸다. 그 덕분에 그들은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들이 몰두한 일은 바로 죽음을 제대로 준비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