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집트의 의술
이집트의 의술이 독창적이며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사실이다. 그들의 의술은 적어도 구왕국시대부터 시작되었고, 기원전 1000년에는 이미 주변지역에서 널리 인정받고 있었다. 물론 그들의 의술이 주문을 외거나 마술을 부리는 주술과 완전히 구분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병을 치료할 때 부적 등을 쓰는 일도 잦았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들 나름의 합리적인 기준과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이 담겨있었다. 심지어 임신을 피하기 위한 피임법에 대한 지식까지 있었다. 이집트 의술은 이후 의학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약물과 식물에 관한 지식은 대부분 이집트인들이 최초로 정립한 것이다. 이런 지식은 그리스인들에게 전해진 뒤 훗날 중세 유럽의 과학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처음으로 피마자유를 약으로 사용한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다른 기술은 메소포타미아에 뒤처졌을지 모르지만, 의학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이집트인들이 훨씬 앞서 있었다. 그러나 의학이 발전했다고 해서 고대 이집트인들이 건강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들은 메소포타미아인처럼 알코올 남용에 대해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사실로부터 특정한 결론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어떤 학자들은 고대 이집트에서 특이하게도 유아 사망률이 높았고, 성인병도 몇 가지 있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많은 미라들을 관찰해 보면, 암이나 뼈가 제대로 자라지 않는 구루병, 성병인 매독 같은 심각한 병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반면 오늘날 이집트에 널리 퍼져 있는 주혈흡충증'은 이미 기원전 2000년부터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상의 사실들로 고대 이집트 의술의 전모를 밝힐 수는 없다. 여러 증거를 살펴보면, 고대 이집트의 처방이나 치료법은 사실 혼란스럽다. 그리고 현대 이전에 다른 문명의 중심지에서 쓰이던 처방이나 치료법보다 더 좋거나 더 나쁘다고 할 수도 없다. 사람들은 미라를 만드는 기술자들에게 부패를 막는 기술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이는 사실과 달랐다. 흥미롭게도 나중에는 미라 자체에 치료 효과가 있다고까지 여겼다. 그래서 수세기 동안 미라를 잘게 부순 가루가 수많은 병을 고치는 최고의 치료제로 쓰이기도 했다. 이외에도 「오셀로」에 나오는 내용처럼,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 가루에 신비로운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이집트 농촌 생활
대부분의 이집트인들은 농민이었다. 메소포타미아와 달리 이집트는 오랫동안 도시로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집트인들은 그들의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는 많은 조각상과 그림을 남겼다. 그들은 시골에 살면서 가끔 일이 있을 때만 작은 읍이나 신전에 들렀다. 고대 이집트에는 테베나 멤피스 같은 몇몇 종교적 성지이자 행정 중심지가 있었지만, 그 외의 지역은 촌락과 시장밖에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대체로 힘든 삶을 살았다. 그들에게 가장 큰 짐은 나라를 위해 일하거나 싸우는 의무, 즉 부역이었다. 파라오가 요구하는 부역이 없을 때는 상당히 여유롭게 지낼 수 있었다. 나일 강이 만들어 준 비옥한 토지 덕분에 농사를 쉽게 지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집트에는 농작물이 풍부했다. 덕분에 농사를 짓지 않는 기술자들이 많이 있어도 사회가 유지될 수 있었다. 이집트 사회는 나랏일을 하는 교육받은 계층과 그렇지 않은 계층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었다. 노예제도도 있긴 했지만, 고대 서아시아의 다른 지역만큼 중요하지는 않았다.
여성의 지위
후대 사람들은 매력적이고 자유분방한 이집트 여성의 모습에 주목했다. 이집트 여성들은 다른 지역의 여성들보다 독립적이고 높은 지위에 있었을 것이라는 인상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이집트의 궁궐에 살던 여성들을 그린 그림을 눈여겨보면 그들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속이 들여다보이는 리넨이라는 소재로 만든 세련된 드레스를 입고, 아름다운 가발을 쓰고,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했다. 얼굴에는 정성 들여 화장까지 했다. 화장품은 이집트에서 특히 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지던 물품이었다. 물론 이런 그림들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확실히 이집트 지배 계급의 여인들은 남자들에게 예속된 존재가 아닌 위엄과 독립성을 갖춘 한 인간으로 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예술 작품 속에서 파라오와 그 배우자들, 그리고 다른 이집트의 귀족 부부들은 꽤 다정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런 모습은 기원전 1000년경 고대 서아시아의 다른 어떤 지역에서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예술적 표현일 뿐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실제로도 그들은 친밀한 사이였을 것이다. 많은 그림과 조각에 등장하는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성들은 다른 지역과 비교할 수 없는 여성의 정치적 위상을 보여 준다. 심지어 왕의 자리도 마찬가지였다. 상속권을 가진 왕녀의 남편은 왕의 자리를 물려받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공주가 누구와 결혼하는가는 큰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왕가에서는 남매간에 결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친족 사이의 결혼으로 생기는 유전적인 악영향은 나타나지 않았다. 심지어 어떤 파라오는 딸과 결혼했는데, 이는 신성한 혈통을 보존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딸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이런 상황은 왕실의 여성을 영향력 있는 인물로 만들어 주었다. 그중 어떤 여성은 중요한 권력자가 되기도 했고, 왕이 되기도 했다. 왕위에 오른 여성은 수염을 붙이고 남자처럼 옷을 입고서 파라오가 되었다. 하지만 여성이 파라오가 되는 것을 모든 사람이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신전에서도 많은 여신을 찾아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이시스'가 특히 유명했다. 문학과 예술에서는 아내와 어머니에 대한 존경을 강조했다. 그것은 상류 사회에서만 강조된 덕목은 아니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사랑 이야기와 가정생활을 다룬 장면들을 보면 당시 사회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 거기에는 부부간의 다정한 사랑, 개인의 휴식과 사생활, 남성과 여성의 평등이 강조되어 있었다. 어떤 여성은 글을 읽고 쓸 줄도 알았다. '여성 서기관을 뜻하는 단어가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성직자나 매춘부 외에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반면 부유한 여자들은 재산을 소유했고 법적인 권리를 누렸다. 이집트 여성의 권리는 많은 점에서 수메르와 비슷했다. 오랜 기간 지속된 고대 이집트 문명을 한마디로 정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여러 증거들을 보면, 당시 여성들은 한 개인으로서 자신을 어느 정도 드러낼 수 있었던 듯하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후대의 다른 많은 나라에서 여성의 사회적 권리가 이만큼 보장된 경우를 찾기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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