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블로그에서는 쿠바를 발견한 콜럼버스와 바티스타를 통해 장기간 쿠바를 독재채제로 들어서는 과정에 대해서 포스팅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독재로부터 쿠바를 구해낸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에 대해서 한 번 포스팅해보겠습니다.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 쿠바를 구하다.
쿠바는 풍경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매우 풍요로운 땅이랍니다. 농작물 경작에는 일정한 기후와 적절한 강우량 그리고 비옥한 토양을 필요로 하는데, 쿠바는 이러한 조건들을 골고루 갖추고 있습니다. 특히 철과 니켈의 보유량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지하자원으로 손꼽힐 만큼 방대하게 축적되어 있습니다.
콜럼버스의 발견 이후 쿠바를 다녀간 사람들마다 쿠바는 지구 상에서 인간이 살아가기에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땅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쿠바를 지칭해 '앤 틸 레스 열도의 진주(The Peearl of the Antilles)'라고 부르기도 한답니다. 콜럼버스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쿠바는 바로 낙원 그 자체였던 것이었습니다. 쿠바는 풍경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매우 풍요로운 땅이랍니다.
농작물 경작에는 일정한 기후와 적절한 강우량 그리고 비옥한 토양을 필요로 하는데, 쿠바는 이러한 조건들을 골고루 갖추고 있습니다. 특히 철과 니켈의 보유량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지하자원으로 손꼽힐 만큼 방대하게 축적되어 있습니다. 콜럼버스의 발견 이후 쿠바를 다녀간 사람들마다 쿠바는 지구 상에서 인간이 살아가기에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땅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쿠바를 지칭해 '앤 틸 레스 열도의 진주(The Peearl of the Antilles)'라고 부르기도 한답니다. 콜럼버스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쿠바는 바로 낙원 그 자체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의 쿠바는 콜럼버스가 말했던 그 낙원과는 전려 거리가 멀었습니다. 1957년 쿠바 인구는 640만 명이었습니다. 천연자원이 풍부한 나라에서 적은 인구가 살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국민들의 생활이 풍요로울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쿠바 사람들은 지독하게 가난했습니다. 1956년 11월 82명의 게릴라들을 태운 배가 멕시코의 항구를 떠나 쿠바로 향했습니다. 쿠바에 상륙 도중 전투를 벌여 이들 중 70명이 숨지고 현재 쿠바 대통령인 카스트로와 그 유명한 체 게바라를 포함해 12명의 게릴라들만 살아남게 됩니다.
이들은 산악지대로 숨어 들어가 무장혁명의 근거지를 건설합니다. 미국의 지원을 받던 쿠바의 독재자 바티스타와의 대결에서 혁명군들은 군사적으로는 항상 열세에 몰렸지만 이들과 함지 독서자에 맞서 싸우고자 하는 쿠바인들의 수는 늘어만 갔습니다. 1958년 12월 31일, 결국 바티스타는 가족들과 함께 도미니카로 망명했습니다.
1959년 1월, 카스트로는 혁명군대를 이끌고 수도인 아바나에 당당하게 입성하게 됩니다. 쿠바 혁명이 성공한 것입니다. 쿠바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쿠바의 정치, 경제적 현실이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사탕수수 재배에만 의지하고 있던 쿠바 경제는 모든 면에서 미국의 실질적인 지배를 받았습니다. 사탕수수 농장의 대부분이 미국의 소유였고, 사탕수수 농장에서 생산된 설탕의 대부분을 미국에 수출했습니다. 미국은 자기 나라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 미국의 뜻대로 움직여 주는 독재정부가 필요했고, 미국은 필요할 때마다 군사력을 동원해 이러한 목적을 손쉽게 달성했습니다.
그러나 절대다수의 쿠바인들은 1년에 3개월 정도인 사탕수수 수확기에만 일을 하고 다른 시기에는 일을 하지 못하는 빈곤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혁명정부는 우선 농업개혁을 통하여 부패한 권력과 연결된 농장들을 몰수하고 부패한 정치인과 협력자들을 처형함으로써 쿠바인들의 기대에 부응했습니다. 수많은 권력자들과 부자들이 미국의 플로리다로 도망쳤고, 이들의 재산은 빈민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졌습니다.
쿠바인들의 예술성

쿠바에서는 거리나 해변 그 어느 곳에 가든 그들만의 음악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와 스페인 문화가 절묘하게 어울려 있는 이곳에서는 누구나 다 예술가입니다. 18세기, 아프리카 각지에서 강제로 끌려온 노예들은 당시 쿠바의 주산업인 사탕수수 농장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아프리카인들에게 노동으로 지친 애환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는 수단이었던 음악은 자연스럽게 스페인 문화와 결합해 그들만의 독특한 음악인 아프로큐반(Afro-Cuban)을 만들어냅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수만리 이국땅에서 설움을 달래기 위해 열정적으로 토해낸 그들의 아픔이 21세기에 이르러 가장 각광받는 음악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입니다. 아프로큐반은 콩가와 봉고, 클레이브 등 아프리카의 전통 타악기들과 플루트, 바이올린, 트럼펫, 그리고 기타 등 유럽의 악기들이 만들어내는 리듬의 결합으로 탄생한 음악입니다. 손(son)이라 불리는 이 음악 스타일에는 1900년대 초반의 탱고와 30년대의 룸바, 40년대와 50년대의 맘보, 또 그 요소들이 바탕이 된 살사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쿠바의 음악은 1980년대 이후 점차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97년 독일의 세계적인 영화감독 빔 벤더스가 연출한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Buena Vista Social Club)'을 통해 세계인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답니다. 쿠바의 수도인 아바나의 동부에 위치한 한 사교클럽에서 빌려온 이 이름은 쿠바를 대표하는 뛰어난 연주가들로 구성된 음악 그룹이자 앨범의 타이틀이며, 동시에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답니다.
쿠바는 원로 가수가 대접받는 사회입니다. 수도 아바나에는 40, 50, 60년대의 가수들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으며 거리나 식 당에서 수많은 악사 그룹들을 만날 수 있는데, 그룹들은 적게는 세 명에서 많게는 열 명이 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아바나 거리 어디에서나 항상 음악이 흐른답니다.
오늘날 아바나는 거친 혁명과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해 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경제와는 달리 이들의 문화, 특히 음악만은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합니다. 쿠바 음악이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진정한 매력은 형식에 크게 제약을 받지 않으며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다는 것과 무엇보다도 그들의 음악과 춤 속에는 인간적인 솔직성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쿠바에 가면 어떤 음악이냐, 춤이냐를 따지기보다는 음악과 박자에 맞춰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아바나 시내에서는 굳이 장소를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어딜 가든지 춤과 노래를 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쿠바는 혁명에 성공한 후에도 미국으로부터 수차례 전쟁 위협을 받고 아직까지도 경제제재 조치를 당하고 있지요. 하지만 쿠바 사람들은 가슴속에 혁명 정신을 간직한 채, 자기들만의 음악을 즐기며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답니다.
오늘은 쿠바를 혁명을 성고하고 쿠바인들에 예술성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쿠바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고싶다면 아래 포스팅을 통해서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2022.04.07 - [세계사] - 쿠바를 발견한 인물과 쿠바를 바꾼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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