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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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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노아 문명의 성취와 멸망. 크노소스 궁 고대 그리스인에게 크노소스는 미노스 왕이 통치하던 크레타의 수도였다. 아마도 방대한 유적이 미노타우로스의 미로에 관한 전설을 낳았을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미노스 왕이 포세이돈에게 노여움을 사서 그의 아내가 머리는 소, 몸은 사람의 형상을 한 미노타우로스를 낳게 했다. 그러자 미노스 왕은 한 번 들어가면 아무도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를 만들어 그 속에 미노타우로스를 가두었다고 한다. 크노소스 궁은 확실히 크레타에 있는 모든 미노아의 궁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궁이었다. 서기 1900년 아서 에번스에 의해 유적 발굴이 시작되었고, 여기서 구운 진흙판 형태의 수많은 기록들이 발견되었다. 진흙판에 쓰인 글들은 '선형 B문자'라고 불렸는데, 해독하는 데 50년의 세월이 걸렸다. 진흙판의 글들을 통해 ..
미노아 문명의 성장과 쇠퇴 미노아 문명의 종말 미노아 문명이 절정을 이룬 것은 기원전 1600년 경이다. 그리고 미노아의 궁전들이 파괴된 것은 그로부터 약 100년 뒤이다. 왜 이러한 사건이 일어났는지는 여전히 궁금증을 자아낸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에게 해 여러 섬의 다른 주요 도시들도 불에 파괴되었다. 과거에는 지진이 많이 일어났다. 미노아 문명의 종말도 지진 때문일 수 있다. 최근 학자들은 그 무렵에 그리스의 티라 섬에서 거대한 화산 폭발이 일어났다는 것을 확인했다. 티라 섬은 크레타에서 100km 정도 떨어져 있었지만, 아마 크레타에도 해일과 지진이 밀려오고 뒤이어 화산재가 떨어져 들판이 어떤 학자는 크레타인이 궁에 살고 있는 통치자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고 생각했다. 또 어떤 학자는 새로운 침략의 증거를 발견하기도 했다..
초기 에게 문명에 대해서 알아보자. 그리스에서 생겨난 해 문명 여러 문화 간의 교류는 서아시아 주변의 민족들에게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그리스에서 일어난 에게 해 문명도 그중의 하나다. 초기 에게 해의 섬들에 자리 잡은 문명은 그 외의 다른 지역처럼 신석기를 바탕으로 일어났다. 그리스에서 처음 발견된 금속 물질인 구리 구슬은 제작 연대가 기원전 4700년 경이다. 이곳은 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럽의 영향도 받았을 것이다. 크레타는 그리스에서 가장 큰 섬이었다. 기원전 2000년 이전의 몇 세기 동안 이곳에 비슷한 구조의 도시들이 생겼다. 도시를 세운 사람들은 신석기시대부터 줄곧 그곳에 살고 있던 민족이었다. 그들이 지중해 동쪽 아나톨리아와의 교류를 통해 에게 문명이라는 뛰어난 업적을 이룬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증거는 명백하지 않다. 그..
국가 권력과 사회 문화의 발달 문자의 역할 문명의 발달이 가속화되는 징조는 문자의 보급에서 나타났다. 문명의 초기 단계였던 기원전 2000년경까지는 여전히 문명의 중심지와 이에 영향을 받은 일부 지역에만 문자가 보급되어 있었다. 길고 뾰족한 모양의 설형문자는 메소포타미아를 통해 퍼져 나갔다. 이 설형문자는 두세 가지 언어에 사용되었다. 이집트에서는 기념 건축물의 비문에 상형문자가 쓰였지만, 일상적으로 쓰는 파피루스에는 단순화된 형태의 신관 문자가 쓰였다. 1000여 년 뒤에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서아시아 전역과 크레타, 그리스에 문자가 전파되었다. 설형문자는 이를 계기로 훨씬 더 많은 언어에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상형문자를 쓰고 있던 이집트 정부조차 외교 문제를 원활히 해결하기 위해 설형문자를 도입했다. 이외에 다른 문자들도 개..
운송의 발달로 인한 무역의 성장 무역과 물품의 비축 고대 유물 가운데에는 기원전 2000년대 서아시아에서 무역의 중요성이 커졌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증거가 많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당시에 실질적인 시장경제가 존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화폐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7세기에 들어서이다. 그 전에는 금속 덩어리나 물건의 교환을 통해 교역이 이루어졌다. 물물교환과 외교적 선물 또는 공물은 당시 흔히 볼 수 있는 관행이었다. 이집트에서는 서기관과 성직자들의 관리 아래 곡물을 쌓아 두었다. 그 덕분에 이집트인들은 흉작 때도 잘 견뎌 낼 수 있었다. 성서의 요셉 이야기에 이런 일들이 잘 묘사되어있다. 화폐의 발명 오늘날에도 물건과 물건을 맞바꾸는 물물교환은 세계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고대의 교역이라는 것도 처음에는 대부분 물물교환이..
상업의 발달 장거리 교역 금속을 다루려면 야금술이 필요했고, 이러한 기술은 또 다른 변화를 일으켰다. 금속을 얻기 위해 먼 지역 간에 복잡한 장거리 무역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장거리 교역으로 다양한 물건을 교류하면서 고대 세계에는 통일된 특성이 생겨났다. 이런 통일성은 기원전 2000년대 말이 되어서야 붕괴되었다. 예컨대 주석은 메소포타미아와 아프가니스탄, 아나톨리아에서 가져와야 했다. 키프로스의 구리 역시 많이 거래되었다. 유럽은 고대 역사에서 주변부에 머물러 있었지만, 구리를 찾는 과정에서만큼은 중요한 지역으로 새롭게 떠올랐다. 발칸 반도에 있는 땅속으로 뚫은 어떤 길을 보면, 기원전 4000년 이전에 구리를 캐기 위해 지상으로부터 20여 미터를 파 들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후 일부 유럽 민족이..
기병의 등장과 무기의 변화가 가져온 고대국가 기병의 등장 말을 타고 싸우는 기병이 등장하면서 전투를 하는 모습도 달라졌다. 안장에 걸터앉아 말 위에서 적과 싸우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기병이지만, 이런 기술을 제대로 익히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말을 몰면서 동시에 활이 나 창을 다루는 일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말 타기는 이란 고원 지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곳에서는 일찍이 기원전 2000년부터 말 타는 기술이 널리 이용되었다. 이 기술은 기원후가 되기 전까지 서아시아와 에게해 지역으로 고루 퍼져 나갔다. 기원전 1000년 이후에는 무기로 무장한 기병이 등장했는데, 그들의 전투력과 신속한 기동력은 보병을 능가했다. 이를 시작으로, 오랜 세월 동안 중무장한 기병은 중요한 전투 수단이 되었다. 하지만 그 가치가 충분히 빛을 발하게 된 것은 몇 세..
고대 서아시아의 암흑시대에 대해서 알아보자. 침략자와 침입자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는 역사시대의 출발점이었다. 세계사는 한동안 이 두 문명지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역사를 다른 세계와 따로 떼어 놓고 다룰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를 고대 세계나 고대 서아시아에 관한 이야기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다. 기원전 2000년이 지나자 곧이어 이민족이 이동하면서 서아시아의 질서가 파괴되고 새로운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또 그로부터 1,000년 후에는 그 외의 지역에도 문명의 중심지가 나타나게 된다. 그때쯤이면 우리는 이미 역사시대로 한참 들어와 있다고 말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역사가들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사실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오랫동안 세계의 그 어떤 지..
이집트의 쇠퇴와 남겨진 유산 이집트의 쇠퇴 신왕국은 투탕카멘이 죽고 나서도 200년간 지속되었지만 점차 빠른 속도로 쇠퇴해 갔다. 신왕국의 쇠퇴는 투탕카멘이 죽은 후 그의 부인이 히타이트 왕자와 결혼하려고 한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결혼식이 있기 전 왕자가 살해당하면서 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후대의 왕들은 쇠퇴한 나라를 되살리려고 애썼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럴 때면 이집트군은 팔레스타인 위쪽까지 세력을 넓히기도 했다. 어떤 파라오는 이전의 파라오들이 다른 민족의 공주와 결혼했던 것처럼 히타이트의 공주를 신부로 삼기도 했다. 하지만 곧 새로운 적들이 나타났다. 히타이트와의 동맹조차 더 이상 보호막이 될 수 없었다. 에게 해는 곧 혼란에 휩싸였다. '섬들이 사람들을 토해냈다', '그들 앞에서는 어떤 ..
이집트의 끝... 선왕국 이후의 이집트 고립의 끝 신왕국시대에 외국과 교류가 늘어났다는 것은 또 다른 사실을 의미했다. 이는 이집트가 주변으로 세력을 넓혀 나가는 방식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뜻한다. 가장 중요한 지역은 지중해 동부의 레반트 해안 지대였다. 투트모세 3세는 이곳을 정복하기 위해 17년의 세월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시리아 동부와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지배했던 거대한 미탄니 제국을 정복하지는 못했다. 그의 후계자들은 방향을 완전히 바꾸었다. 급기야 한 파라오는 미탄니의 왕녀와 결혼까지 했다. 이렇게 신왕국은 레반트 지역에서 나라를 보호하기 위해 미탄니와 좋은 사이를 유지하는 친선 정책을 펼쳐 나갔다. 이집트는 오랫동안 보호 벽처럼 작용했던 고립에서 서서히 빠져나오고 있었다. 한편 미탄니는 점차 강해지는 북쪽의 히타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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